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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 보글보글 맛좋은 라면 후르르쩝쩝 후르르쩝쩝 맛좋은라면


오늘은 라면의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봐요 




라면은 최초 중국이 원조라는 설도 있으나 지금과 같은 라면의 형태는 일본에서 처음생산 된게맞다.

1958년 안도모모후꾸 라는 일본인이 술집에서 튀김요리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던중에 라면제조법을 

생각해낸것이 최초라고 한다.


당시 라면은 시일이 경과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때문에 1961년 명성식품이란 곳에서 현재와 같은 스프를 분말로 만들어 

끓여먹는 형태의 라면을 생산하게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하며 라면이라는 말도 일본어의 라멘 에서 따온것입니다.


1950년대의 일본은 제2차 대전 패배의 후유증으로 인해 건국 이후 최대의 고난기를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여 미국에서 밀가루를 지원 받아 빵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안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쌀밥을 주식으로 하던 식습관 탓에 빵만으로는 공복감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밀가루를 이용한 새로운 식품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았는데, 어느 날 술집을 간 안도는 덴뿌라를 기름에 튀기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게 된다. 바로 집으로 돌아온 안도는 밀가루를 국수로 만들어 튀겨 보았고, 이후 몇 차례 실험 끝에 결국 라면 개발에 

성공하였다. 안도가 만들어 낸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아지츠케면은 국숫발에 양념을 묻힌 것으로 끓는 물에 2분만 넣고 끓이면 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63년 삼양라면이 일본의 라면 제조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치킨탕면)을 선보이면서 라면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인들에게 라면은 생소할 뿐이어서 초기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혼분식 소비 권장정책에 힘입어 라면이 대중화됐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우리 일상에 

빠질 수 없는 식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라면 1인당소비량은 단언코 1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라면을 소비하는 나라는 단연 중국으로 연간 408억 개의 라면을 먹는다고 한다. 

그에 이어 인도네시아 139억 개, 일본 53억 개, 베트남 43억 개, 미국 40억 개이고 그를 이어 우리나라가 34억 개로 6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1인당 소비량에서는 수십 년간 한국이 독보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인당 연간 소비량 69개 전체 소비량으로 세계 1위인 중국의 1인당 소비량은 32개로 반절에 못 미친다



[라면을 개발한 '안도 모모후꾸'에 대하여 조금더......]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가한다.

지금과 같은 세상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있을 수 없을법 한 놀라운 사실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의 경영 철학은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먹는 것에 관계하는 일은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성직이다. 먹는 것이 풍족하게 될 때야말로 세상은 평화롭게 된다.

세상을 위해 먹을것을 만든다. 는 그의 신념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구절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특허 등을 독점하지 않고 국내외 업체에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는 등 

경영 철학에 부합하는 행보를 걸어왔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91세가 되던 2001년에는 우주에서 먹을 수 있는 우주식 라면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실제로 2005년 7월 일본인 우주비행사 

노구치 소이치가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우주 스테이션에서 사상 처음으로 라면을 먹는 중계 장면을 보고 

안도가 감개무량해 하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오랫동안 상하지 않으면서 싸게 팔리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만들어 인류가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는 그의 철학은 현실이 되었다. 

언론은 그를 “미스터 누들”이라 부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안도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채 그는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인류의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해서 그런가 96세의 나이까지 장수 하셨군요 ^^ 

허나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한것은 꾀나 아쉽네요 ... 서양권에서는 동양만큼은 라면을 많이 먹지 않아서 그런것일까하는

혼자만의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부턴 매일 라면을 먹을때마다 개발자 안도씨가 생각날 것만 같습니다.


한개발자의 마음이 들어가 있기도 한 라면스토리 맛있고도 소중한 라면 이야기 였습니다.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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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은 내가요리사 짜라짜라짜라 짜장미엔 짜장면 . 안녕하세요 오늘은 짜장면 에 대하여 알아보겠네요



짜장면 하면 항상 나오는 토론주제가 있습니다. 짜장면은 우리나라것이냐 중국음식이냐 하는 바로 그것인데요.


그리하여 그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겟다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짜장면이 한국에서 나온 만든 요리라고요? 중국을다니면서 숱한 짜장면을 먹어보신 분에 의하면 짜장면은 한국에서 


발명된 요리가 아니라 발전된 요리라는 건 확실하답니다.


중국에도 짜장면이 있습니다. ' 炸?面 (zhajiangmian) '  


우리나라 한자발음으로는 '작장면'이지만 중국발음으로는 '짜/쟝!미엔!' 정도 발음이 됩니다.  성조 빼고 빠르게 발음한다면


'짜쟝멘' 정도 됩니다. 비슷하지요!?  


우리나라에서 발명한 요리인지 중국 짜장면에서 진화한건지 알아보기전에 화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교는 중국국적  화인은 해당국국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화교(화인)는 중화민국(대만)과도 연관되서 좀더 복잡합니다.


화교의 역사는 아주 길지만  우리가 아는 화교는 보통 아편전쟁이후 서구지역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대량으로 끌려갔다고 할까요 


팔려갔다고 할까요. 우리나라 개항초기에 들어온 화교역시. 중국에서도 해외에 나갈수밖에없을 정도로 저소득층였던 대부분의 화교들은 꾸리


(고력 苦力 Coolie)라고 불리는 막노동자였고 개중 머리가 있으면 소규모잡상인으로  손재주가 있으면 세가지 칼로 삽니다.  


세가지 칼은 바로


가위는 재단사 면도칼은 이발사 부엌칼은 당연 요리사입니다.  


우리나라 짜장면의 역사는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화교의 첫번째 물결이 개항이후였다면  


두번째 물결은 1949년 제 2차 국공내전시 공산당의 승리때문였습니다. 제 2차 국공내전은 중국이 일본에 승리한 그러니까 일본이 항복한 


1945년 이후 공산당(당시 중공 현 중국)과 국민당(당시 중(화민)국 현 대만)간의 내전을 말합니다.


당연히 근거지를 잃고 위기감을 느낀 산동쪽 국민당계열들은 가까운 한국으로 피난을나오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교분들은 주로 교동(산동 교주 동쪽)출신인 이유는 우리나라랑 가까운 지리적이유가 제일 큽니다. 


제 어렸을때 제 고향 군산에  중국음식점이 많았는데  거진 산동출신들이셨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6.25 와  


박정희정권때 화교부동산 및 동산매매제한등 차별조치등으로 많이 떠나게 되고 그 빈 주방을 한국인제자나 조수들이 메우게 됩니다.


 '왜 이렇게 짜장면얘기랑 상관없는 얘기가 긴가?'하고 생각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이제 본론입니다. 


짜장면은 바로 산동주방장들이 만든 산동요리 그러니까  중국 8대요리중 하나인 로채(?菜)에 속합니다.  


중국4대요리는 많이 들어보셨을겁니다.  북경, 상해, 광동, 사천요리를 말하지요. 


8대요리로는 산동(?菜) 사천(川菜) 강소(?菜) 절강(浙菜) 안휘(徽菜) 광동(?菜) 복건(?菜) 호남(湘菜) 요리입니다.   


 자! 4대요리에서 8대요리로 늘어나니까 북경요리가 사라졌지요?  북경요리는 원래 산동요리에 속합니다. 


산동요리(?菜)는 넓게 지역적으로 산동 북경 동북을 아우르는 요리이기도 합니다.


북경요리중에서 제일 유명한 간판요리는 뭘까요?  북경오리구이 그리고 북경짜장면입니다. 


중국에서는 면은 요리로 안넣어줍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요리로 취급하니까 넣도록 하겠습니다.


짜장면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춘장입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춘장이 없습니다.  


한국짜장면과 중국짜장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첨면장(?面?)이라는 밀된장을 쓰고 우리나라에서는 첨면장에 


카라멜을 섞은 춘장을 씁니다. 발효된장맛이라 우리나라사람 입에 당연 잘 맞고요 역시 첨면장으로 만든 중국볶음요리몇몇은 


짜장맛과 흡사한 맛이 납니다. 


한국과 중국 짜장의 차별화는 사실 1948년 화교이셨던 왕송산씨가 춘장을 발명하고나서 입니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먹던 짜장면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짜장면을 인천 공화춘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얘기지  


짜장면을 공화춘에서 발명한 건 아닙니다.  


저는 근거미약한 한국짜장면의 창조설을 부정하며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진화설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6.25 이후 한국에 밀가루가 들어오게 된것도 짜장의 진화에 한몫을 합니다.  


원래 첨면장은 대두였는데 밀가루를 넣기 시작하게 된거지요. 지금은 다시 대두를 많이 쓴다고 하는군요.


그다음의 차이는 뭘까요?  야채의 대량투하라고 할까요.  물론 위에 보시는 것처럼 고명으로 야채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다양한 야채를 넣고 볶는건 한국짜장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야채를 넣고 볶은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요 중국에서 양념으로 주는 볶은짜장(첨면장)은 아주 짭니다. 


지금도 역시 짭니다. 중국와서 한국처럼 짜장다넣고 비비시면 짜서 못먹을 정도니 조금씩 넣어서 간을 맞추셔야 합니다.  


야채때문에 짜장의 짠맛을 많이 중화시켜줍니다. 


아마 우리나라 음식들이 염분이 많아서 새로운 중화 짠맛에 저항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저항감을  양배추나 양파로 부드럽게 완화시킨 것 같습니다.


 


결론은 한국짜장면은


중국짜장면에서 진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가 고민되는날엔 짬짜면 드시기를 추천합니다 하하하 .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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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스러운 여성미의 완성 그이름 하이힐 입니다.


하이 힐 ~


말그대로 굽이 높다는 뜻입니다. 현대여성의 전유물 그리고 무기(?) 라고 할 수 있는 (남자에게도 깔창이란게 있긴하지만)요.


하이힐의 발명기와 역사, 그리고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하이힐의 사전적 의미

하이힐(영어: high-heeled footwear, high heels, heels)은 발꿈치 부분이 높게 들어 올려진 신발을 지칭하는 말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굽이 높은 신발을 가리키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용의 신발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이힐의 유래와 역사.


하이힐이라하면 보통 지금들 생각하시는 것은 키가작은 여성의 키를 높혀주는 역할이라던지 하이힐을 신음으로서 돋보이게 되는 각선미나

이쁘지 않은 다리를 시각적으로 날씬하고 이쁜다리로 보이게도 만들어줘, 어떤 미의 역할로서 여성의 매력을 높히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을 많이들 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하이힐은 말도안되는 이유(?) 로 처음 발명된 이유가 가히 충격적(?) 이기도 하군요.


하이 힐은 16세기 말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17세기 초에 이르러 차차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한 발명이 아니었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과정들의 결과로, 스페인의 여자들이 신었던 목제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 힐

의 선구라고 말해진다. 



특히, 하이 힐은 이태리에서 유행하였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변소 시설이 되어 있는 집이 극히 드물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소변을 거리에 내다버렸고, 이리하여 대부분의 도시 뒷길은 어느 곳이나 쓰레기와 대변이 쌓여 있고, 이것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깊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18세기에도 유럽에는 궁전에조차 변소가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변소가 없어 궁전 복도의 후미진 곳이나 가로수 밑에 대소변 을 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깔끔함을 강조하는(?) 서양도 아주 오랜 옛날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했군요.


하이 힐을 신음으로써 키가 커보이게 하고 몸매의 곡선이 강조되어 보다 여성적 으로 보이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하이 힐은 거리가 더러운 오물이 흐르는 진흙탕이었으므로, 길을 걸을 때 발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꽤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거의 군대에서 신는 군화와 비슷한 맥락의 개발이 아닌가 싶군요.


하이힐의 보급과 보편화바람의 시작은...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 하이힐은 프랑스의 구두 디자이너 로제 비비에에 의해 탄생되었다. 

1954년 파리 시내에 가게를 연 비비에의 첫 창작은 파격 그 자체였다. 

검정,갈색,푸른색이 대부분이던 가죽을 총천연색으로 확대하고 플라스틱,셀로판 섬유 등 가능한 재료를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54년 그는 가는 뒷굽의 하이힐을 내놓음으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이힐이 인기를 끌면서 대중에게 보편화 되기 시작한 시점 이군요.


하이힐의 종류는


토오픈 힐

주로 토오픈, 오픈 토 슈즈라고 불린다. 발가락 부분이 틔어 있는 슈즈. 가장많은 하이힐 종류 같습니다.

 

가보시힐

가보시힐 앞부분에 굽이 있는 힐 종류

시대마다 디자인의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2009년 현재 킬힐의 유행으로 앞부분의 굽이 점점 높아지는 추새이며

평균 1cm, 1.5cm 2cm가 주를 이루고 있다

 

속가보시힐

가보시힐과 같이 앞굽이 있지만 가보시힐과는 다르게 앞굽이 속으로 들어가 있는 형태의 슈즈, 가보시힐의 한 종류

 

웨지힐

앞굽과 뒷굽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 슈즈. 저는 개인적으로 웨지힐이 참 이쁘더라고요

 

백오픈 힐

발 뒷축을 감싸주는 가죽 부분을 끈으로만 고정 시킨 슈즈, 주로 봄부터 여름 하절기에 많이 출시 된다


사이드 오픈 힐

발 옆부분이 틔여 있는 슈즈, 양쪽으로 틔여있는 경우와 한쪽으로만 틔여 있는 경우가 있다


플랫 슈즈

일명 단화, 뒷굽이 낮아 편하게 신을 수 있다. 플랫슈즈도 요새는 꼭 굽이 높은 신발보다도 선호하는 여성들도 많아지는 

추세로 개성을 더 강조하는 정형화된 미를 탈피하고 싶어하는 여성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이힐을 신을때 건강을위해 조심하고 주의해야될점.

하이힐을 신으면 체중이 앞으로 쏠리기 때문에 몸을 뒤로 젖혀야만 똑바로 설 수 있게 된다. 

자연히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바짝 당긴 자세가 돼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단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잇다. 

하지만 족부정형외과 의사들은 여성의 발 건강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하이힐을 꼽는다. 


장기간 하이힐을 신을 경우 요통,관절염,디스크로 고생할 수 있고, 엄지발가락이 휘면서 참기 힘든 통증을 느끼게 되는 

버선발 기형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불가피하게 하이힐을 신게 되더라도 뒷굽이 4cm 이상인 것은 피하고, 하루 2∼3시간은 넘지 말라고 의사들은 충고한다



미를 위해서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여성의 매력을 무한 뽐내는 것도 좋지만 , 그에 따른 부작용과

생길 수 있는 건강의 위협도 꼭 고려하셔야 되겠죠? 하이 힐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 까지구요 하이힐도 좋치만 건강한 발관리와 함께 멋을 내시기를 추천하네요 안녕히 계세요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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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남녀노소. 전부 입고 패션을 좀 안다하는 피플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아이템. 그 이름은 뭔가


바로 청바지 아니던가요


'청바지에 흰티' 가 어울리는 사람이 정말 진정한 멋쟁이 이다. 라는 문장으로도 형용될 만큼 패션의 선두주자에게는

어디에서나 빠지지않는 그 청바지. 의 유래와 역사 재밌는 이야기들을 알아봅시다.


청바지라고 한다면은 '리바이스'에서 시작하여 '리바이스'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청바지의 독자적인 그 주체는

'리바이스' 라는 브랜드였다.


리바이스의 창시자 Levi Strauss는 독일에서 출생한 독일사람 입니다.

그 후 그는 그의 형제들이 사는 뉴욕으로 이사와서 그들에게 바느질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850년에 Levi는 샌프란시스코에 약간의 돛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천을 가지고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차가운 진흙 강에서 금을 캐고 있는 광부일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굉장히 얇은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청바지라는 자체가 없던 시절이였기 때문에요.

굉장히 추워 보였습니다.


순간 Levi는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가 가져온 돛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천을 이용해 그들에게 바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황회색의 색깔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청바지는 말입니다. 지금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블루진 색깔이 아니였습니다. 황회색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Levi가 샌프란시스코에 양복점(리바이스)을 차렸을 때, 프랑스에서 특별히 짙은 청색의 옷감을 수입했습니다. 

이것이 청바지의 첫 탄생과 기원역사가 된 격입니다. 


그리고 리바이스의 스티치 문양 기원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리바이스 스티치 그 빨간색의 타원형 마크문양 말입니다.

그 것은 아마 Levi가 리바이스를 세운 샌프란시스코가 해안에 접한 도시다 보니 바다의 상징인 갈매기를 스티치로 사용하지 않았나하는

가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리바이스스티치는 2차대전 중 실을 아끼기 위해 페인트로 그리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은 단순히 디자인 만을 위해서 일부러 거센 질감따위의 표현등을 하기위해 넣는 페인트 칠이라던가 하는 따위가

원래는 실과 천을 아끼기 위해서 한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청바지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 청바지의 역사

 

미국의 문화가 당시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의해 퍼져나간 것이 많다.

우리나라도 1950년 한국전쟁 떄 미군이 들어오면서 군복이 아닌 사복차림일 때는 청바지를 입었었는데요.


전후 가난한 시절에 청바지는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 라고합니다..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까지는 독재 정부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며, 부담없이 노상에 앉을수도

있는 편한옷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청바지와 통기타가 유행하던 바로 그시절 그단어로도 유추해볼 수 있게 말입니다.

값싸고 질기며 아무 옷과도 잘어울리는 가장 수수한 차림으로 사랑 받았다.

청바지가 아닌 다른바지는 오히려 안 어울리는 이미지로 보일 정도라고 이야기가 있을정도였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청바지 시대가 도래하였다.

소득 증대로 인하여 외국 청바지 브랜드들이 물밀 듯이 한국에 들어오게되었습니다.


국산 브랜드들도 나름대로 고급화 전략과 방안을구축하고 큰 성공들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는 국산청바지가 외국브랜드의 청바지보다 비싼 것들도 많습니다.


재미난 청바지의 역사와 유래 , 그리고 청바지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야 청바지 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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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맛있지만 재미있는 만두의 역사와 유래  만두썰에 대해 알아봅시다.


일단 만두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몇가지 썰이 있답니다.


가장 유력한 [첫번째 유래]


만두는 청조말기(약 1958년)에 빚기 시작한 13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북성 무청현(지금은 천진시로 편입돼 있음)의 


고귀우라는 소년이 만두 빚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의 어릴 적 별명이 구불리였던 데서, 손님들은 그가 빚은 만두를 구불리 라고 불렀습니다. 한때, 고귀우는 그의 만두를 


덕취호라고 불렀던 까닭에 손님의 발길이 끊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구불리 라고 이름 붙인 이후에는 더 많은 손님들이 그의 만두를 먹게 되었습니다. 


고귀우가 만두를 빚을 때, 속은 별 차이가 없지만, 빚은 만두 모양이 예쁘고, 밑면이 타지 않고, 더군다나 맛이 있었다고 합니다.


1900년대초 원세개가 천진에서 육군을 훈련시키던 중, 구불리 만두를 먹게 되었고, 이를 북경에 있는 서태후에게 선물로 갔다주었습니다. 


그 후 서태후가 구불리 만두를 좋아하게 되었고, 바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유래]


중국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위의 맹획을 공격할 때, 어떤 사람이 "남만(남쪽 오랑캐)에서는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는데, 그러면 신이 음병(은밀하게 도움을 주는 병사)을 보내 준다고 합니다." 하면서 그렇게 하기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공명은 그대로 하지 않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소를 만들고 밀가루로 싸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것으로 인해 음식 이름을 '남만의 머리'라는 의미로 만두라 했다가 음식 명칭인 만두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만두의 조상은 상화


우리나라에 만두가 들어온 것은 고려 시대였는데, 그 당시에는 상화로 발효시킨 찐빵과 비슷한 것이 였습니다. 


상화는 가루에 술을 넣어 부풀린 반죽을 찐 것으로 중국의 만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사'에는 충혜왕 때 궁 주방에 들어가 만두를 훔쳐 먹은 자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처음 만두란 말이 나온 것은 '영접도감의궤'(1643년)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고, 그 후에는 궁중의 잔치에도 종종 차렸다고 합니다.


궁중잔치 기록에는 생치만두, 골만두, 생복만두, 진계만두, 생합만두 등이 나옵니다. '이순록'에는 "인조가 전복만두를 좋아하였는데 


생신날에 왕자가 비와 함께 동궁에서 직접 만두를 만들어 가지고 새벽에 문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00년대의 '음식방문'의 생합만두는 "좋은 생합을 골라 만두 소처럼 만들어 넣고 녹말을 묻혀서 데쳐 초간장에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병시'라고 하는 음식이 나오는데, 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어되, 주름을 잡지 않고 반으로 접어 


반달 모양으로 빚고 장국에 넣어 끓인 만두국을 말합니다.




추가로 위에서 이야기 했던 삼국지에서의 만두이야기를 조금 더 해드리자면요...


촉나라가 야만족이 까불어대는통에 쳐들어갓죠 (맹획이다스리는 남만국)


쳐들어가서 맹획을 무려 7번이나 이기고잡았는데 "이길수있을떄까지 덤벼봐라"라 하면서 풀어줫답니다.


8번째 잡히고 맹획은 포기를 하고 제갈량에게 복종 하였습니다.(매우 고맙게 생각하면서)


그래서 촉나라군대가 귀국 할때 마중 해줫는데 촉나라를 갈려면 어느강을 건너야되는데 폭풍우가 매우쌔서 도저히 건널수가 없던겁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맹획을 불러 어케하면 건널수 잇느냐 햇더니 사람머리 49개를 강물에 제물로바치면 잠잠해진다.


라고 햇다지요. 제갈량은 이미전쟁에서 피를 너무많이 흘렷기때문에 더이상 살상은 없어야된다며


사람머리와같은 밀가루속에 고기를 넣은 (만두)를 사람머리와같이 만들어 강물에 던졋더니 강이잠잠해졋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물로바친 밀가루속에 고기를 넣은것이 만두가 되었다고하네요 


요즘은 만두종류도 참 다양하게 많아요 그렇지 않나요.


재미있는 만두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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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평생을 함께한다고 하여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만큼 여성에게 흔하고 여성을 따다라니는 그이름 그 제품


바로 스타킹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오늘은 스타킹의 역사스토리 시간을 가져봐요



[스타킹의 역사]


스타킹(stocking)의 착용은 본래 다리의 보온의 목적인 위생적 기능에서 출발하였지만, 현대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감에 

따라 의복착용시 필수품으로써 성능이 더 중요시 되고 있으며, 그 착용률도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타킹에 대한 소비자 의식 역시 1회용 소모품에서 액세서리의 개념으로서의 자기표현을 위한 패션상품으로 변화하고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 문양을 가진 패션성이 강한 스타킹이 등장하고 있으며, 소재면에서도 위생적인 성능과 함께 내구성, 

신축성, 착용감 등에 있어서 고품질특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스타킹의 점차적 수요증가와 그에 따른 고품질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도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스타킹에 대한 연구가 

더욱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스타킹의 유래] 


양말에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는데, 각종 양말류를 지칭하는 호우저리(hosiery)와 긴 양말(stocking)과 짧은 양말(socks)을 

종합적으로 지칭하는 우즈(hose)가 있다. 그 중 스타킹은 발과 다리부분에 꼭 맞게 착용하는 목이 긴 양말로서 삭스(socks)와는 

다르게 보통 무릎 위까지 올라가는 긴 양말을 말합니다.


스타킹의 원형은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남자복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란 하의인 호우즈로 14세기 경부터 점차 

위로 올라가 양말 겸 바지로 하반신에 착용하게 되었으며, 15세기에는 허리까지 이르는 길이가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윗부분이 넓어지면서 트렁크 호즈(trunk hose)가 나타났고 이에 따라 아랫부분은 따로 분리되어

스타킹 오브 호우즈(stocking of hose)라고 부르게 되었다.


편물 스타킹은 1589년 영국 목사인 윌리암(L.Willam)이 양말짜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어 상류층 여성사이에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17세기 말 비단대신 면사와 모사로 짠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그 후 2차대전 무렵 화학섬유의 출현으로 이전의 비단제품이 나일론제품으로 대체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스타킹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57년 봉조스타킹이란 명칭으로 주식회사 남영나일론에 의해서였다. 

그 후 1965년 유영산업(반달표 스타킹), 화창산업(화창레스)에서 도입, 국내 스타킹 산업의 시발점이 되었다. 

생산초기에는 고가정책으로 판매가 이루어졌으나, 1968년 미니선풍과 경제 수준 향상으로 수요가 급증하게 되면서 

각 회사마다 증설을 서둘렀으며, 이때부터 스타킹의 대중화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스타킹은 여성보다는 사실 먼저 남자가 착용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다소 우스꽝스런 이야기 이기도 하네요.



[스타킹의 형태구분]


1.풀 패션 스타킹(full fashioned stocking):발 모양에 맞춰서 짠 것을 뒷솔기에서 꿰맨 것이다.

 

2.심리스 스타킹(seamless stocking):통모양으로 둥글게 짠 후 열처리로 발 모양을 세트하였고, 솔기가 없다.

 

3.트리코 스타킹(tricot stocking):트리코 직물로 재단 ·봉제한, 다소 두껍고 올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이다.




[스타킹에 대해 가장많이 궁금해 하는 것들중]


비싼 스타킹일수록 줄이잘 나가지 않는다?


=>값비싼 스타킹을 사는 소비자 중에는오래 신을 수 있으니 오히려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비싼 스타킹의 요소는 기능성·신축성·촉감·장식성(패턴)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촉감은 부드럽고 재질이 얇을수록 고급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제품에는 가느다란 미세사를 사용한다.

미세사를 사용한 스타킹은 실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자연히 가격이 올라가지만 실의 특성상 보푸라기가 잘 일어나고 쉽게 줄이 간다. 


미세사는 촉감이 부드럽고 투명한 색상을 내는 반면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비싼 스타킹이라고 해서 줄이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잘 나가지 않는 제품은 바로 데니어가 높은 스타킹인데 데니어가 높은 제품은 두껍고 불투명하다.



[스타킹의 간단한 세탁법]


다른 옷과 같이 빨면 스타킹에서 물이 빠져 옷에 물이 들 수 있으므로 단독 세탁한다.


되도록 손빨래하고 세탁기로 빨 경우에는 세탁망에 넣어주어야 늘어나지 않고 스타킹이 상하지 않는다. 


타이즈는 보푸라기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손빨래한다.

 

물에 담가 두었다가 중성세제를 사용, 가볍게 주물러 빤다.



여기 까지 현대인여성의 필수품 스타킹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보았는데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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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가지가지 생활속의 팁!


옛것이지만 현대에도 아주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전통그릇 방짜유기에 대해 알아봅시다.


저희집에도 있는 그릇인 유래와 역사가 오래된 '방짜유기' 에 대해서 글을 좀 적어보려합니다.

방자유기 라고도 하고요 흔히 표현하기 쉽게는 놋그릇 이라고도 많이 부르기도 합니다


[방짜유기란]

유기의 종류중 가장 질이 좋은 유기로,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불에 달구어 가며 두드려서 만든 그릇 을 방짜유기라고 합니다.


방짜유기는 음식을 담는 식기류에 주로 쓰입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액을 불에 달구어 망치로 여러 차례 두들겨서 만드는 제작과정이 있습니다. 

이때 주석의 비율이 일반 청동 그릇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합니다.



[방짜유기의 역사]

대한민국의 청동기 문화는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스키타이’청동기 문화와 관련이 있는 북방계의 ‘오르도스-요령지방’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시대 초기에는 비파형동검과 조문경을 제작하였고, 후기가 되면 세형청동검을 독자적으로 주조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다뉴세문경, 방울, 의식구를 비롯한 각종의 도구를 제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빛깔이 고운 ‘고려동’을 생산하여 중국과 교역을 하였다. 왕족과 귀족은 방자기법으로 제작한 얇고 질긴 청동그릇을 식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귀족 왕족들의 전유물 이기도 하였다는 내용의 설이 있네요 ?

생긴 투박함과는 달리. 지금시대로 따지면 있는집안의 명품그릇 격이 었군요.


방짜유기를 제작하는 곳에서는 간단한 식기뿐아니라 그릇뚜껑 수저 젓가락

주전자도 제작을 한다고 하네요.가능한 모든 형태의 식기와 주방에 필요한 용품을 제작 가능

한것으로 보입니다. 



'방짜유기'에 대한 역사이야기를 조금만더 살펴보자면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에서 채굴에 힘을 썼으며, 경국대전에 의하면 국가에서 쓰는 유기를 만드는 유장(鍮匠)을 중앙 장인인 경공장(京工匠)으로 공조(工曹)에 8명, 상의원(尙衣院)에 4명을 두었고, 지방 관아에 필요한 유기를 만드는 외공장(外工匠)도 상당수 배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라고 하는데 '방짜유기'를 따로 만드는 관리인과 공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상당히 전문성있고

약간은 놀랍기도한 내용입니다. 아마 왕족귀족이 주로 쓰는 그릇이었기 때문일까요??

.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정책의 영향으로 불교적 색채를 띠는 금공품이 많지 않았던 반면 담배함, 화로, 향로, 반상기 등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주는 형태의 생활용품과 민예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자기를 대중적인 식기로 쓰던 시대였음에도 유기는 고려시대에 이어 상류층에서 식기로 사용하였으며,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도 생활 용구로 사용되어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고 시장을 형성하였다.

역시 여기에도 주로 경제적인 수준이 높은편의 사람들이상이 주로 사용하였다는 내용을 또 다시 확인해 볼 수 가 있네요 ^^


근대 말에는 일본에 의한 유기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각 가정에서 소유한 거의 모든 유기들을 수탈당하였다. 그 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유기는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였으나 6·25 전쟁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부터 연탄가스에 변색되기 쉬운 놋그릇 대신 스테인리스 그릇을 선호하여 유기는 점차 사라졌다.

하하 ... 그릇조차도 일본의 영향을 받고 점차 없어지기 시작하였다니. 

조금은 화도 나는 부분이 아닐수 없군요 ... 우리나라의 보물들 또한 일제가 수탈하여 현재에도

일본에 있는 물건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자주 뉴스에도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죠 속상하네요.


[방짜유기의 실용성과 효능]

최근 각종 실험을 통해 병원균, O-157 살균기능, 농약성분 검출기능 등이 밝혀지면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열보존률은 사기그릇, 스테인리스, 방짜유기 중 방짜유기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살균기능과 더불어 열보존률이 그릇중 가장 뛰어나. 맛있는 밥과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다는 훌륭한 그릇이라는 결론입니다.



[방짜유기의 제작과정]

여러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조직적으로 제조해야 하므로,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고도의 숙련 기술이 요구된다. 경기도 안성시가 전통적으로 유기 제조로 유명했다.'안성맞춤'이라는 표현도 안성의 유기에서 나온 것이다.

정말 재미있지 않나요? '안성맞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의 유래가 방짜유기 제작에서 비롯된것이라니요.


방짜유기는 주물 유기와는 달리 정확히 합금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을 되풀이 해서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이다. 

이런 기법으로 만들어진 방짜 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으며 비교적 변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쓸수록 윤기가 나는 장점이 있다. 또한 방짜는 독성이 없으므로 식기류를 가장 많이 생산해낸다고 합니다.


1945년 경 안성 일대에만 공방이 20여 개 있었을 정도로 성황이었으나, 연탄이 보급되면서 변색이 잘 되고 닦기도 번거로운 유기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기 제조 기술 보유자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공예문화 보존을 노력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에도 지정된 '방짜유기' 입니다.



[방짜유기는 몸에 해롭지는 않은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방짜유기그릇의 얼룩은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

유기그릇에 음식이나 유해물질이 닿으면  반응을 한답니다.

음식에 농약성분이나 납성분이 있는경우 그릇이 변색이 되어

음식이 해롭다는것을 알려줄뿐.. 몸에 해롭지는 않습니다 (마치 은수저,은젓가락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군요.)

 얼룩은 간단히 유기그릇 닦는방법을 이용하여 닦아주시면

말끔히 사라지기 때문에 이용에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방짜유기의 관리]


방짜유기의 관리는 생각보다 너무 의외로 간단한 편입니다.

먼지 유기와 초록색 마른 수세미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장갑을 끼시고 마른초록색수세미로 그릇의 결을 따라 약간의 힘을주어 닦아내시면 됩니다.

글면 약간의 검은가루가 묻어나오게 되는데 유기그릇의 주성분 주석가루이고 몸에 유해되는성분이 아니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후 2차로 주방세제를 묻혀서 한번더 닦아주시면 사용하면서 생겼던 얼룩이나 잔때가 벗겨져

다시 새것처럼 됩니다.



그外에 방짜유기에 대한 몇가지 더!


유기의 종류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자(方字)와 주물(鑄物), 반방자(半方字) 등이 있다. 가장 질이 좋은 유기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먼저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도가니에 녹인 엿물로 바둑알과 같은 둥근 놋쇠덩어리를 만들어 제작과정을 거친다.


유기제품에 관하여....

일단 유기제품은 공장에서 기계식으로 생산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하기 때문에 제품이 일정하지 않고 흠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제품의 한계이자 매력으로 보셔야 합니다.


놋제품은 구리와 주석과 은이 들어갑니다. 이 원료를 순도가 높은 정량의 원료를 사용합니다. 공기중의 산소랑 결합하여 산화될 경우 구리아 주석이 있어 푸른 녹이 있을 수 있으나 세척하면 되고 유기제품의 놋과 주석은 실제 음식의 독을 제거하고 미량의 경우 흡수되어도 해독과 소화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하는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유기제품은 은으로 인해 흰색을 띄는 은은한 황색이 고유색입니다. 유기는 막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금속이라 산화막이 생길 수 있습니다. 수세미와 세제로 거칠게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천년을 가는 금속이라 세게 다르시는 것이 더 명품의 멋을 내는 비결입니다.

광택제는 1년에 한번 정도 사용하시면 됩니다.


보관시에는 물기와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시고 유해 가스등에 접촉하지 않게 하십시요.


유기는 우리 조상의 지혜로 이어온 우리 고유의 식기 문화입니다. 더운 음식은 더욱 덥게, 추운 음식은 더욱 춥게 하는 마법의 식기이자 독을 예방하고 해독하는 기능을 가진 멋과 맛을 함께 제공하는 유기 놋그릇을 잘 알고 사랑해 주세요.


옛것이나 과학(?) 이 깃든. 기능과 살균등 효과가 뛰어난 신기한 방짜유기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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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래 역사 스토리 코너입니다.


전국민이 사랑한 아니 전세계인이 사랑하고 즐기는 음료 콜라의 왕 코카콜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코 카 콜 라]


일단 코카콜라의 첫 시작은 다소 황당한 생각이 들정도 이기도 합니다.

콜라는 1886년에 약국을 운영하던 존 팸버튼 이라는 박사가 소다에 갖가지 약재를 섞어서 소화제 대신 판매한것에서 유래합니다.

엄청 웃기죠? 음료수나 술상에서나 보는 콜라가 원래는 소화제 였다니 말이에요.


제조 비법은 코카라는  나무가 있는데 거기서 코카인을 추출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코카인이 중독성이 있어서 쓸 수 없으므로

콜라의99.5%는 설탕과 물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것은 너무 미미해 밝힐 가치가 없다며 안밝혔다고 합니다. 막상 알고보면 너무

아무것도 아닌것(?) 이려나 봐요.


코카콜라 회사의 정보.


국가 : 미국

업종 : 청량음료 제조

설립자 : J.S. 팸버턴

설립일 : 1886년

본사 : 조지아주 애틀랜타

한국지사 : 한국코카콜라보틀링(주)


코카콜라의 유래와 역사 



1886년 애틀랜타의 약제사인 J.S. 펨버턴(1831~1888)이 코카의 잎, 콜라의 열매, 카페인 등을 주원료로 하는 음료를 만들어

‘코카콜라’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하였다. 후에 동시의 약제사인 캔들러가 제조 ·판매권을 매입하여 1919년 현재의 회사조직을 설립하고 

청량음료로서 판매를 개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성의 후원으로 매출이 대폭적으로 늘어났다고합니다. 

현재는 코카콜라 외에 환타·스프라이트·터부 등의 청량음료·과즙음료를 제조하여 세계 각국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미국에서 최대의 셰어(Share)를 자랑하며 국외에서도 아메리카니즘의 대명사로 쓰일 만큼 보급되어 있다.


코카콜라는 본사에서 원액(제법 미공개)만을 제조하여 국내 및 해외의 특정회사에게만 공급하는 프랜차이즈 방식을 채용하고있습니다.

특정회사에서는 원액에 물·탄산·설탕 등의 첨가물을 배합하여 병 또는 캔에 넣고 루트 세일즈(직매) 방식에 의하여 판매한다.


국외의 회사에 대해서는 자본·종업원 등에 관하여 철저한 현지주의를 채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1968년 두산그룹 산하의 두산음료(주)를 시작으로 우성식품(주)·범양식품(주)·호남식품(주) 등이 

지역별로 코카콜라 제조회사를 운영하였으나, 1997년 현지법인인 한국코카콜라보틀링(주)을 설립하여 직영체제로 전환하였다.


라고 하네요. 


그리고 콜라에 대해 알아보면서 정말 의외였고 놀랐던 점은. 코카콜라원액은 황산과 같은 산성도로 위험한 화학물질 이라고합니다.

살짝 겁이 나기도 하는 이야기네요.


#코카콜라 브랜드. 상표에 관한 이야기 스토리.


콜라를 생각하면 생각나는 색은 누가 뭐라 해도 빨간색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코카콜라의 상징이 되어 온 빨간색이 처음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고합니다. 

처음 코카콜라가 개발되었던 1886년부터 1890년까지는 흑백으로 광고문구를 사용했다가, 1890년 후반부에 이르러서 빨간색으로 

로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1차 세계 대전 이후, 코카콜라의 빨간색이 정형화되었고, 이후 50년간 변함없이 사용되어 오다가 1970년 다이나믹 컨투어 

로고 디자인이 소개되면서 좀더 밝은 빨간색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코카콜라 광고에 빨간색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틀랜타에 위치한 코카콜라를 판매하던 약국의 외벽에 흰 천 바탕에 

빨간 글씨로 옥외 광고를 시작했을 때부터 였다고 하는데요. 

당시 광고 문구는 맛있고 상쾌한 코카콜라! 맛있는 코카콜라가 5센트! 였다고 합니다 정말 웃기네요. 


현재 쓰이는 정형화된 빨간색 바탕에 흰 글씨의 코카콜라 로고는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수년간 코카콜라 로고는 흰 바탕에 빨간 글씨 또는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번갈아 가며 사용하다가, 

1965년 코카콜라사가 실시한 조사 결과, 코카콜라의 트레이드마크를 가장 강력하게 대표할 수 있는 것이 빨간색 바탕에 흰색의 로고이면서

또한 코카콜라의 트레이드마크와 가장 강력하게 시각적으로 연상이 되는 것은 빨간 원판임이 알려져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콜라를 개발한 사람은 정말로 돈을 많이 벌었을 것 같아 부럽네요.

그리고 콜라 라고 하면 빨간색 코카콜라상표를 모두가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코카콜라의 브랜드 가치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 아닐까요?


우린 항상 기름진 음식을 먹을때 고민합니다. 콜라먹을까 사이다 먹을까?


저의 선택은 코카콜라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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