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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스러운 여성미의 완성 그이름 하이힐 입니다.


하이 힐 ~


말그대로 굽이 높다는 뜻입니다. 현대여성의 전유물 그리고 무기(?) 라고 할 수 있는 (남자에게도 깔창이란게 있긴하지만)요.


하이힐의 발명기와 역사, 그리고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하이힐의 사전적 의미

하이힐(영어: high-heeled footwear, high heels, heels)은 발꿈치 부분이 높게 들어 올려진 신발을 지칭하는 말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굽이 높은 신발을 가리키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용의 신발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이힐의 유래와 역사.


하이힐이라하면 보통 지금들 생각하시는 것은 키가작은 여성의 키를 높혀주는 역할이라던지 하이힐을 신음으로서 돋보이게 되는 각선미나

이쁘지 않은 다리를 시각적으로 날씬하고 이쁜다리로 보이게도 만들어줘, 어떤 미의 역할로서 여성의 매력을 높히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을 많이들 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하이힐은 말도안되는 이유(?) 로 처음 발명된 이유가 가히 충격적(?) 이기도 하군요.


하이 힐은 16세기 말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17세기 초에 이르러 차차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한 발명이 아니었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과정들의 결과로, 스페인의 여자들이 신었던 목제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 힐

의 선구라고 말해진다. 



특히, 하이 힐은 이태리에서 유행하였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변소 시설이 되어 있는 집이 극히 드물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소변을 거리에 내다버렸고, 이리하여 대부분의 도시 뒷길은 어느 곳이나 쓰레기와 대변이 쌓여 있고, 이것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깊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18세기에도 유럽에는 궁전에조차 변소가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변소가 없어 궁전 복도의 후미진 곳이나 가로수 밑에 대소변 을 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깔끔함을 강조하는(?) 서양도 아주 오랜 옛날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했군요.


하이 힐을 신음으로써 키가 커보이게 하고 몸매의 곡선이 강조되어 보다 여성적 으로 보이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하이 힐은 거리가 더러운 오물이 흐르는 진흙탕이었으므로, 길을 걸을 때 발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꽤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거의 군대에서 신는 군화와 비슷한 맥락의 개발이 아닌가 싶군요.


하이힐의 보급과 보편화바람의 시작은...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 하이힐은 프랑스의 구두 디자이너 로제 비비에에 의해 탄생되었다. 

1954년 파리 시내에 가게를 연 비비에의 첫 창작은 파격 그 자체였다. 

검정,갈색,푸른색이 대부분이던 가죽을 총천연색으로 확대하고 플라스틱,셀로판 섬유 등 가능한 재료를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54년 그는 가는 뒷굽의 하이힐을 내놓음으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이힐이 인기를 끌면서 대중에게 보편화 되기 시작한 시점 이군요.


하이힐의 종류는


토오픈 힐

주로 토오픈, 오픈 토 슈즈라고 불린다. 발가락 부분이 틔어 있는 슈즈. 가장많은 하이힐 종류 같습니다.

 

가보시힐

가보시힐 앞부분에 굽이 있는 힐 종류

시대마다 디자인의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2009년 현재 킬힐의 유행으로 앞부분의 굽이 점점 높아지는 추새이며

평균 1cm, 1.5cm 2cm가 주를 이루고 있다

 

속가보시힐

가보시힐과 같이 앞굽이 있지만 가보시힐과는 다르게 앞굽이 속으로 들어가 있는 형태의 슈즈, 가보시힐의 한 종류

 

웨지힐

앞굽과 뒷굽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 슈즈. 저는 개인적으로 웨지힐이 참 이쁘더라고요

 

백오픈 힐

발 뒷축을 감싸주는 가죽 부분을 끈으로만 고정 시킨 슈즈, 주로 봄부터 여름 하절기에 많이 출시 된다


사이드 오픈 힐

발 옆부분이 틔여 있는 슈즈, 양쪽으로 틔여있는 경우와 한쪽으로만 틔여 있는 경우가 있다


플랫 슈즈

일명 단화, 뒷굽이 낮아 편하게 신을 수 있다. 플랫슈즈도 요새는 꼭 굽이 높은 신발보다도 선호하는 여성들도 많아지는 

추세로 개성을 더 강조하는 정형화된 미를 탈피하고 싶어하는 여성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이힐을 신을때 건강을위해 조심하고 주의해야될점.

하이힐을 신으면 체중이 앞으로 쏠리기 때문에 몸을 뒤로 젖혀야만 똑바로 설 수 있게 된다. 

자연히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바짝 당긴 자세가 돼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단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잇다. 

하지만 족부정형외과 의사들은 여성의 발 건강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하이힐을 꼽는다. 


장기간 하이힐을 신을 경우 요통,관절염,디스크로 고생할 수 있고, 엄지발가락이 휘면서 참기 힘든 통증을 느끼게 되는 

버선발 기형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불가피하게 하이힐을 신게 되더라도 뒷굽이 4cm 이상인 것은 피하고, 하루 2∼3시간은 넘지 말라고 의사들은 충고한다



미를 위해서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여성의 매력을 무한 뽐내는 것도 좋지만 , 그에 따른 부작용과

생길 수 있는 건강의 위협도 꼭 고려하셔야 되겠죠? 하이 힐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 까지구요 하이힐도 좋치만 건강한 발관리와 함께 멋을 내시기를 추천하네요 안녕히 계세요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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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남녀노소. 전부 입고 패션을 좀 안다하는 피플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아이템. 그 이름은 뭔가


바로 청바지 아니던가요


'청바지에 흰티' 가 어울리는 사람이 정말 진정한 멋쟁이 이다. 라는 문장으로도 형용될 만큼 패션의 선두주자에게는

어디에서나 빠지지않는 그 청바지. 의 유래와 역사 재밌는 이야기들을 알아봅시다.


청바지라고 한다면은 '리바이스'에서 시작하여 '리바이스'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청바지의 독자적인 그 주체는

'리바이스' 라는 브랜드였다.


리바이스의 창시자 Levi Strauss는 독일에서 출생한 독일사람 입니다.

그 후 그는 그의 형제들이 사는 뉴욕으로 이사와서 그들에게 바느질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850년에 Levi는 샌프란시스코에 약간의 돛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천을 가지고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차가운 진흙 강에서 금을 캐고 있는 광부일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굉장히 얇은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청바지라는 자체가 없던 시절이였기 때문에요.

굉장히 추워 보였습니다.


순간 Levi는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가 가져온 돛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천을 이용해 그들에게 바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황회색의 색깔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청바지는 말입니다. 지금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블루진 색깔이 아니였습니다. 황회색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Levi가 샌프란시스코에 양복점(리바이스)을 차렸을 때, 프랑스에서 특별히 짙은 청색의 옷감을 수입했습니다. 

이것이 청바지의 첫 탄생과 기원역사가 된 격입니다. 


그리고 리바이스의 스티치 문양 기원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리바이스 스티치 그 빨간색의 타원형 마크문양 말입니다.

그 것은 아마 Levi가 리바이스를 세운 샌프란시스코가 해안에 접한 도시다 보니 바다의 상징인 갈매기를 스티치로 사용하지 않았나하는

가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리바이스스티치는 2차대전 중 실을 아끼기 위해 페인트로 그리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은 단순히 디자인 만을 위해서 일부러 거센 질감따위의 표현등을 하기위해 넣는 페인트 칠이라던가 하는 따위가

원래는 실과 천을 아끼기 위해서 한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청바지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 청바지의 역사

 

미국의 문화가 당시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의해 퍼져나간 것이 많다.

우리나라도 1950년 한국전쟁 떄 미군이 들어오면서 군복이 아닌 사복차림일 때는 청바지를 입었었는데요.


전후 가난한 시절에 청바지는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 라고합니다..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까지는 독재 정부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며, 부담없이 노상에 앉을수도

있는 편한옷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청바지와 통기타가 유행하던 바로 그시절 그단어로도 유추해볼 수 있게 말입니다.

값싸고 질기며 아무 옷과도 잘어울리는 가장 수수한 차림으로 사랑 받았다.

청바지가 아닌 다른바지는 오히려 안 어울리는 이미지로 보일 정도라고 이야기가 있을정도였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청바지 시대가 도래하였다.

소득 증대로 인하여 외국 청바지 브랜드들이 물밀 듯이 한국에 들어오게되었습니다.


국산 브랜드들도 나름대로 고급화 전략과 방안을구축하고 큰 성공들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는 국산청바지가 외국브랜드의 청바지보다 비싼 것들도 많습니다.


재미난 청바지의 역사와 유래 , 그리고 청바지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야 청바지 맨 !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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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맛있지만 재미있는 만두의 역사와 유래  만두썰에 대해 알아봅시다.


일단 만두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몇가지 썰이 있답니다.


가장 유력한 [첫번째 유래]


만두는 청조말기(약 1958년)에 빚기 시작한 13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북성 무청현(지금은 천진시로 편입돼 있음)의 


고귀우라는 소년이 만두 빚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의 어릴 적 별명이 구불리였던 데서, 손님들은 그가 빚은 만두를 구불리 라고 불렀습니다. 한때, 고귀우는 그의 만두를 


덕취호라고 불렀던 까닭에 손님의 발길이 끊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구불리 라고 이름 붙인 이후에는 더 많은 손님들이 그의 만두를 먹게 되었습니다. 


고귀우가 만두를 빚을 때, 속은 별 차이가 없지만, 빚은 만두 모양이 예쁘고, 밑면이 타지 않고, 더군다나 맛이 있었다고 합니다.


1900년대초 원세개가 천진에서 육군을 훈련시키던 중, 구불리 만두를 먹게 되었고, 이를 북경에 있는 서태후에게 선물로 갔다주었습니다. 


그 후 서태후가 구불리 만두를 좋아하게 되었고, 바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유래]


중국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위의 맹획을 공격할 때, 어떤 사람이 "남만(남쪽 오랑캐)에서는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는데, 그러면 신이 음병(은밀하게 도움을 주는 병사)을 보내 준다고 합니다." 하면서 그렇게 하기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공명은 그대로 하지 않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소를 만들고 밀가루로 싸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것으로 인해 음식 이름을 '남만의 머리'라는 의미로 만두라 했다가 음식 명칭인 만두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만두의 조상은 상화


우리나라에 만두가 들어온 것은 고려 시대였는데, 그 당시에는 상화로 발효시킨 찐빵과 비슷한 것이 였습니다. 


상화는 가루에 술을 넣어 부풀린 반죽을 찐 것으로 중국의 만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사'에는 충혜왕 때 궁 주방에 들어가 만두를 훔쳐 먹은 자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처음 만두란 말이 나온 것은 '영접도감의궤'(1643년)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고, 그 후에는 궁중의 잔치에도 종종 차렸다고 합니다.


궁중잔치 기록에는 생치만두, 골만두, 생복만두, 진계만두, 생합만두 등이 나옵니다. '이순록'에는 "인조가 전복만두를 좋아하였는데 


생신날에 왕자가 비와 함께 동궁에서 직접 만두를 만들어 가지고 새벽에 문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00년대의 '음식방문'의 생합만두는 "좋은 생합을 골라 만두 소처럼 만들어 넣고 녹말을 묻혀서 데쳐 초간장에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병시'라고 하는 음식이 나오는데, 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어되, 주름을 잡지 않고 반으로 접어 


반달 모양으로 빚고 장국에 넣어 끓인 만두국을 말합니다.




추가로 위에서 이야기 했던 삼국지에서의 만두이야기를 조금 더 해드리자면요...


촉나라가 야만족이 까불어대는통에 쳐들어갓죠 (맹획이다스리는 남만국)


쳐들어가서 맹획을 무려 7번이나 이기고잡았는데 "이길수있을떄까지 덤벼봐라"라 하면서 풀어줫답니다.


8번째 잡히고 맹획은 포기를 하고 제갈량에게 복종 하였습니다.(매우 고맙게 생각하면서)


그래서 촉나라군대가 귀국 할때 마중 해줫는데 촉나라를 갈려면 어느강을 건너야되는데 폭풍우가 매우쌔서 도저히 건널수가 없던겁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맹획을 불러 어케하면 건널수 잇느냐 햇더니 사람머리 49개를 강물에 제물로바치면 잠잠해진다.


라고 햇다지요. 제갈량은 이미전쟁에서 피를 너무많이 흘렷기때문에 더이상 살상은 없어야된다며


사람머리와같은 밀가루속에 고기를 넣은 (만두)를 사람머리와같이 만들어 강물에 던졋더니 강이잠잠해졋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물로바친 밀가루속에 고기를 넣은것이 만두가 되었다고하네요 


요즘은 만두종류도 참 다양하게 많아요 그렇지 않나요.


재미있는 만두 이야기 였습니다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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