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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 중 하나라고 불리는 곳 가장큰 즐거움을 주고 그래서 중요할 수 밖에 없는곳 이빨 곧 치아 가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어딜까요. 네 물론 중요하지 않은 곳은 한군데도 없을 겁니다.


모든 필요에 의해서 조물주(?)가 만들어낸 신체의 각 부분부분이 있는 것일테니까요.


그치만 그중에서도 중요도가 높고 , 관리를 잘해야 되는 중요성 , 많이 아파지면 돈도 참 많이 드는 곳이 어디인고 하면


바로 치아 이빨입니다. 


오늘은 치아의 중요성과 관리방법등을 통하여 건강한 치아생활로 거듭나는 글을 써보려 합니다. 


건강한 치아를 위한 간단한 10가지 지식.


1. 성인의 정상 치아갯수는 28~32개 이다.

 

2. 35~44세 성인의 86%는 잇몸병을 가지고 있다.

 

3. 충치 3위, 잇몸질환 9위로 발병빈도가 높다.

 

4. 65세 이상 노인의 평균 치아 수는 12개이다.

 

5. 12세 아동의 평균 충치경험 치아수는 세계평균에 비해 2개 가량 높다.

 

6. 잇몸질환이 있는 사람은 악성 세균들이 발견된다.

 

7. 나쁜 구강건강은 심장질환, 당뇨, 영양실조, 소화불량 등 전신건강에 해를 줄 수 있는 원인 중의 하나다.

 

8. 치아의 검은점, 줄, 구멍은 충치 발생현상이다.

 

9. 건강한 잇몸의 색은 연한 선홍빛을 나타낸다.

 

10. 플라그는 충치와 잇몸질환의 주 원인이다.

 

건강한 치아를 위한 10가지 실천방법

 

1. 플라그 제거 및 잇몸 마사지에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올바른 잇솔질이다.

 

2. 효과적인 플라그제거를 위해 자신의 구강 상태에 맞는 적절한 칫솔을 선택한다.

 

3. 이를 닦을 때에는 플라그가 잘 끼는 치아와 잇몸 경계부위를 잘 닦아야 한다.

 

4. 하루 세번, 식후 3분이내에, 3분 동안 모든 치아의 구석구석을 골고루 잇솔질하는 습관을 생활화한다.

 

5. 칫솔은 3개월에 한번씩 새것으로 교체한다.

 

6. 치실, 치간칫솔 사용을 습관하하여 치아 사이사이의 플라그 제거를 돕는다.

 

7. 잇솔질 후 단 몇 초라도 혀를 닦음으로서 구강 내 박테리아 번식을 억제한다.

 

8. 치아표면의 플라그를 제거해주는 섬유질이 많은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는다.

 

9. 자신의 구강건강 확인을 위해 거울에 이와 잇몸을 자주 비춰본다.

 

10. 6개월마다 정기적인 구강진단과 스케일링을 통해 구강질환을 사전에 예방한다.




치아의 건강에 좋아 섭취하면 좋은 음식들


물은 이빨에서 당분과 산성을 씻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빨의 썩는것을 막는 무기물인 불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을 자주 마시면 좋다고 합니다


섬유질음식 (푸른채소류)

푸른채소류와 같은 섬유질 음식은 치아에 좋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슨, 섬유질이 풍부할수록 많이 씹어야 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시금치나 채소따위는 씹을때 음식이 치아를 쓸어주는 역할을 하며 이때 침도 많이 생성되어 치아에 좋다고 합니다.


무설탕껌

천연 항산화제인 침의생산을 촉진시켜주는 효과가 있답니다.

뼈를 강화하는 칼슘과 인산염이 들어있어 직접적인 영향도 줍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설탕껌은 자이리톨로 단맛을내는데 이는 박테리아의 증식을 억제 한다고 합니다.


정기적인 스케일링의 중요성과 스케일링의 주기


건강한 치아관리는 미관상, 건강상의 이점 뿐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며, 

올바른 칫솔질과 정기적인 스케일링을 통해 치아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칫솔질은 횟수보다 정확한 방법이 중요한데, 칫솔질만으로로 부족한 부분을 치간칫솔이나 치실을 활용하는것도 좋다.


스케일링을받으면 이빨이 넓어진다 이빨이 시리다등의 오해로 스케일링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케일링 시술 직후 느껴지는 시린감은 오히려 자주 스케일링 하는 사람에게서는 드물게 나타나며 치아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치석이 제거되어 빈공간이 생긴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음식물 등을 먹고 난 후 치아를 깨끗이 닦지 못하면 음식물의 미세한 찌꺼기가 치아에 남게 된다. 

이 찌꺼기가 치아에 세균 덩어리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 치태 혹은 플라그라고 한다. 

이런 치태가 치아에 오랫동안 남아있으면 침속 칼슘 성분을 흡수하면서 단단한 돌처럼 굳으면서 치석을 만든다. 

치석은 잇몸을 검붉은 색으로 붓게 하고 피가 잘 나게 한다. 심한 입 냄새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다양한 잇몸질환을 일으킬 수 있어 제때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단하게 굳은 치석은 양치질만으로 쉽게 제거되지 않아 정기적인 스케일링으로 관리해야 한다. 

간혹 스케일링 후 시림 등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보통 시린 증상이 심한 사람일수록 치석이 많았거나, 잇몸 염증이 심했던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구적으로 치아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시린 증상은 자연적으로 나아진다. 

또한, 치석은 음식물 등으로 인해 계속해서 형성되므로 1년에 1~2회 정도 정기적인 스케일링으로 관리해야 한다.


자 우리모두 치아관리에 신경을쓰어 건강한 치아로 생활하고 거듭날수록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관리못한 치아는 아주 비싸고 많은 돈을 지출시키니까 말이죠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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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과일의 제왕 톡톡 맛있는 한번손댔다간 손이 노랗게 물들때까지 먹을 위험이 있는


과일이 있다 그 이름 은 바로바로 '귤' 이라 하겠다.


한번쯤은 귤에 중독(?) 되어 종일 귤만까먹다가 손이 약간 노오래진 경험도 한 두번씩은 있을터입니다.


전 사실 잘 몰랐는데 귤은 겨울이 제철인가 봐요. 겨울되면 항상 귤이 많이 보이니 말이죠.


오늘은 귤의 역사와 유래 또 섭취했을때 좋은점 등등을 좀 나열해서 알려드려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먹는귤의 역사와 유래.


우리나라에서 감귤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단 옛기록이 없어 옛날부터 재배되어온 재래귤들의 도입경로와 도입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일본의 야사인에는 삼한으로부터 橘(Tachibana)나무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사기록 및 일본전기에는 垂仁朝의 명을 받아 田道間守가 常世國(제주도로 추정하고 있음)에서 非時香果(橘)를 구하여 

돌아간 것 이 서기 70년경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우리나라의 감귤재배 역사의 최초기록인 탐라지를 보면 백제 문주왕 2년(A.D. 476) 탐라국에서 감귤을 공물(貢物)을 받았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나 감귤을 식품으로 이용한 문헌상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구전이나 개인비법 등을 통하여 가계내로 전승되어 왔다.과거 재배된 재래감귤의 용도는 주로 진상용으로써 주로 약용 및 의례용으로 사용된 것이 기록(태조실록「도감상서」등)되고 있다.



현재의 재배품종인 溫州蜜柑은 구한말 일본에 건너가 있던 박영효가 가지고 와서 제주시 구남천에 심은 것이 처음이라고 

하는 구전도 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1910년대에 새로이 감귤재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1903년에 제주에 부임한 Esmile J. Taque신부(嚴神父)가 1911년 제주의 벚나무 원종과 일본의 온주밀감을 교환하여 

현재의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복자수도원에 심었으며 지금도 그때의 귤나무 10여 그루가 많은 귤을 생산하고 있다. 

이것이 제주에서의 온주밀감 재배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전라남도 종묘장 제주지장은 1913년에 워싱톤네블오렌지, 온주밀감, 하귤 등 3종류의 묘목 150본을 농가에 권장 재배하였으며 이후 일제하의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귀포 근처에 온주밀감원을 조성하였다. 

해방 이후 1950년에 정전된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감귤의 수요가 늘고 가격도 고가이어서 재배면적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이 당시 감귤 성목 몃 나무만 있으면 자녀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하여 대학나무라 불리어졌다. 

그후 1960년대 중반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으로 책정되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감귤은 

급격히 신장하기 시작하여 1969년부터 획기적으로 증식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감귤은 우리나라 과수 중 사과 다음으로 면적과 생산량이 늘어 확고한 2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감귤의효능


현재 제주산 감귤을 이용한 식품으로의 실태는 영양학적인 측면에서는 

비타민 공급원, 식이섬유 공급원(셀룰로즈, 펙틴 등), 유기산 공급원(구연산, 사과산 등) 및 유리당(포도당, 과당 등)의 공급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주산 감귤류 함유된 기능성물질 이용하여 연구되고 이용되고 있는 분야는 감귤과피에 함유된 정유성분(테레핀류, R-리모넨)을 이용한 

항암물질·천연세정제 및 향료추출, 감귤함유 플라보노이드(헤스페리딘, 나리진, 노빌레틴 등)를 이용하여 모세혈관 강화제 

및 암 억제물질로 사용되고 있고, 감귤귤 과즙에 함유된 리모노이드류(리모닌, 아닐린, 노밀린, 이카친 등)의 

종양억제성분 이용, 카로티노이드(β-카로틴, 크립토키산틴 등)를 이용한 성인병예방 즉 체내의 활성산소를 억제시켜 

노화를 억제하고 암을 억제시키는 효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특이한 것으로 오렌지나 귤껍질을 먹으면 살이 빠진다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는데  

BBC방송 인터넷판에 따르면 캐나다 제약회사인 ‘KGK 사이너자이저’사의 연구원 엘즈비에타 쿠로프스카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은 

콜레스테롤이 함유된 사료를 먹여 살을 찌운 햄스터에게 아프리카 탕헤르산 오렌지등 오렌지나 귤의 껍질을 먹인 결과 

연구진은 이 햄스터들에게서 심장마비의 주범으로 알려진 LDL콜레스테롤이 최고 40%나 감소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결과 껍질이 과일 속살보다 이러한 물질이 20배나 많다고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제주감귤은 천혜의 청정지역에서 재배되어 상기에 소개된 약리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미래에는 복합적이고 약리적인 성분이 가미된 기능성의 감귤세대로 전개될 것이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또다른 뛰어난 귤의효능

제주의 온주감귤에는 암억제 물질인『베타 클립토키산틴』이 과일 1개에 1㎎이상으로 

수입오렌지 보다 100배가 더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이『일본과수 시험장과 교토부립대학 공동연구팀』에 의하여 밝혀졌습니다.

하루에 감귤 1~2개를 먹으면 암억제 효과가 있으며, 특히 피부암 대장암 억제에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감귤의 10대 기능효과


암예방, 면역증강, 항균작용,피로회복,고혈압예방,감기예방,체질개선,멀미약,식욕증진,임산부,피부미용등.


맛좋고 건강에도 좋은 귤 많이 드시고 건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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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사랑하는 간식 햄버거와 동급으로 오늘날 많은 음식점과 커피숍에도 판매되고 있는 식사로도 손색없는 그이름


양쪽의 두개의 빵안에 햄,베이컨,고기,계란,야채 등을 취향에 맞게 넣어서 먹는 이 음식을 우리는 샌드위치라고 부릅니다.


샌드위치는 누가 처음 만들어 낸 것일까?


사실은 샌드위치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냈답니다. 예 재미있게도 샌드위치라는 이름자체가 샌드위치를 만든 사람의 이름인 것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샌드위치 백작과 샌드위치의 탄생]


이 간편식은 프랑스 샌드위치 백작의 작품이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내놓으라하는 귀족들이 모여 살던 파리의 중심가.

백작하면 으레 지와 덕을 겸비한데다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자를 연상하게 마련이지만 샌드위치의 백작의 경우는 좀많이 달랐다고합니다.

재산은 많고 넘치는데 그토록 돈쓸데가 없어 도박에 푹 빠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재미로 시작했으나 점차 심해져 하루일과가 아예 도박판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 끝나고, 

세월이 흐를 수록 그 정도는 더해만 갔다고 합니다.

잠을 설치는 것을 물론 식사까지 예사로 거르며 도박에만 매달리기 일쑤이다보니 자연히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약해져만갔습니다.

도박을 하면서 짧은 시간내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없을까.


자꾸만 식욕을 잃어가던 백작은 마침내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기 이른것입니다.

하인을 시켜 파리 시내를 샅샅이 뒤졌으나 마음에 쏙 드는 음식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백작 자신도 답답했지만 하인들의 걱정 또한 태산같을수밖에요 극한직업이 따로 없었군요.


백작이 잘못되면 그들 역시 상전을 잘못 모신 죄로 화를 면키 어렵기 때문이었다. 옛날 우리나라와 서양도 똑같네요.

아무리 식사를 권해도 거들떠 보지않는 백작때문에 애를 태우던 하인들은 궁여책으로 

빵과 고기 그리고 채소를 되는대로 으깨 버무려 밤알만하게 뭉쳐 노름에 미쳐있는 백작의 손에 쥐어주고맙니다.

무심코 받아들고 한입삼킨 백작은 의외로 그 음식을 좋아하게됩니다.


하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샌드위치 백작의 머리속은 빵과 빵사이에 고기와 채소를넣어 익히는게 어떨까 생각을합니다.

하인들을 시켜 만든 새로운 식품은 노름방에 모인 사람들을 감탄시켰습니다.

번거롭지 않는데다 맛도 기가 막히고 걸리는 것 없이 잘 넘어가니 갖출 것은 다 갖춘 셈이었습니다.


샌드위치 백작은 '고기와 채소를 넣은 식빵'이라는 명칭으로 특허출원을 마치고 하인들에게 대량생산을 지시했다네요

폭발적인 인기였다.

순식간에 파리를 강타하고 이내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갔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복잡한 명칭 대신 발명가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샌드위치의 인기와 더불어 샌드위치 백작의 주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고, 백작은 이를 계기로 노름에서 깨끗이 

손을 씻고 성실한 관리로 다시 돌아갔다.


번외편으로

샌드위치 백작은 영국의 해군성 초대 장관이 되어 탐험가 제임스 쿡의 항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쿡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태평양 폴리네시아의 한 군도를 샌드위치 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이 바로 오늘날 미국의 50번째 주에 해당되는 하와이입니다


라는 이야기 네요. 식사와 건강은 물론 도박까지 그만두게 만들어준 샌드위치는 정말 샌드위치백작의 신의한 수 가 아니였나싶은데요 내인생에도 샌드위치같은 신의 한수가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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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 보글보글 맛좋은 라면 후르르쩝쩝 후르르쩝쩝 맛좋은라면


오늘은 라면의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봐요 




라면은 최초 중국이 원조라는 설도 있으나 지금과 같은 라면의 형태는 일본에서 처음생산 된게맞다.

1958년 안도모모후꾸 라는 일본인이 술집에서 튀김요리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던중에 라면제조법을 

생각해낸것이 최초라고 한다.


당시 라면은 시일이 경과되면 쉽게 변질되는 단점때문에 1961년 명성식품이란 곳에서 현재와 같은 스프를 분말로 만들어 

끓여먹는 형태의 라면을 생산하게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하며 라면이라는 말도 일본어의 라멘 에서 따온것입니다.


1950년대의 일본은 제2차 대전 패배의 후유증으로 인해 건국 이후 최대의 고난기를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여 미국에서 밀가루를 지원 받아 빵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안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쌀밥을 주식으로 하던 식습관 탓에 빵만으로는 공복감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밀가루를 이용한 새로운 식품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았는데, 어느 날 술집을 간 안도는 덴뿌라를 기름에 튀기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게 된다. 바로 집으로 돌아온 안도는 밀가루를 국수로 만들어 튀겨 보았고, 이후 몇 차례 실험 끝에 결국 라면 개발에 

성공하였다. 안도가 만들어 낸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아지츠케면은 국숫발에 양념을 묻힌 것으로 끓는 물에 2분만 넣고 끓이면 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63년 삼양라면이 일본의 라면 제조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치킨탕면)을 선보이면서 라면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인들에게 라면은 생소할 뿐이어서 초기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혼분식 소비 권장정책에 힘입어 라면이 대중화됐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우리 일상에 

빠질 수 없는 식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라면 1인당소비량은 단언코 1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라면을 소비하는 나라는 단연 중국으로 연간 408억 개의 라면을 먹는다고 한다. 

그에 이어 인도네시아 139억 개, 일본 53억 개, 베트남 43억 개, 미국 40억 개이고 그를 이어 우리나라가 34억 개로 6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1인당 소비량에서는 수십 년간 한국이 독보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인당 연간 소비량 69개 전체 소비량으로 세계 1위인 중국의 1인당 소비량은 32개로 반절에 못 미친다



[라면을 개발한 '안도 모모후꾸'에 대하여 조금더......]


안도 모모후쿠의 경영철학 : 인스턴트 라면 제조특허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가한다.

지금과 같은 세상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있을 수 없을법 한 놀라운 사실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의 경영 철학은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먹는 것에 관계하는 일은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성직이다. 먹는 것이 풍족하게 될 때야말로 세상은 평화롭게 된다.

세상을 위해 먹을것을 만든다. 는 그의 신념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구절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특허 등을 독점하지 않고 국내외 업체에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는 등 

경영 철학에 부합하는 행보를 걸어왔다.


안도 모모후쿠,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다.

91세가 되던 2001년에는 우주에서 먹을 수 있는 우주식 라면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실제로 2005년 7월 일본인 우주비행사 

노구치 소이치가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우주 스테이션에서 사상 처음으로 라면을 먹는 중계 장면을 보고 

안도가 감개무량해 하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오랫동안 상하지 않으면서 싸게 팔리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만들어 인류가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는 그의 철학은 현실이 되었다. 

언론은 그를 “미스터 누들”이라 부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한 안도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어 마땅하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채 그는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인류의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해서 그런가 96세의 나이까지 장수 하셨군요 ^^ 

허나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한것은 꾀나 아쉽네요 ... 서양권에서는 동양만큼은 라면을 많이 먹지 않아서 그런것일까하는

혼자만의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부턴 매일 라면을 먹을때마다 개발자 안도씨가 생각날 것만 같습니다.


한개발자의 마음이 들어가 있기도 한 라면스토리 맛있고도 소중한 라면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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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은 내가요리사 짜라짜라짜라 짜장미엔 짜장면 . 안녕하세요 오늘은 짜장면 에 대하여 알아보겠네요



짜장면 하면 항상 나오는 토론주제가 있습니다. 짜장면은 우리나라것이냐 중국음식이냐 하는 바로 그것인데요.


그리하여 그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겟다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짜장면이 한국에서 나온 만든 요리라고요? 중국을다니면서 숱한 짜장면을 먹어보신 분에 의하면 짜장면은 한국에서 


발명된 요리가 아니라 발전된 요리라는 건 확실하답니다.


중국에도 짜장면이 있습니다. ' 炸?面 (zhajiangmian) '  


우리나라 한자발음으로는 '작장면'이지만 중국발음으로는 '짜/쟝!미엔!' 정도 발음이 됩니다.  성조 빼고 빠르게 발음한다면


'짜쟝멘' 정도 됩니다. 비슷하지요!?  


우리나라에서 발명한 요리인지 중국 짜장면에서 진화한건지 알아보기전에 화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교는 중국국적  화인은 해당국국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화교(화인)는 중화민국(대만)과도 연관되서 좀더 복잡합니다.


화교의 역사는 아주 길지만  우리가 아는 화교는 보통 아편전쟁이후 서구지역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대량으로 끌려갔다고 할까요 


팔려갔다고 할까요. 우리나라 개항초기에 들어온 화교역시. 중국에서도 해외에 나갈수밖에없을 정도로 저소득층였던 대부분의 화교들은 꾸리


(고력 苦力 Coolie)라고 불리는 막노동자였고 개중 머리가 있으면 소규모잡상인으로  손재주가 있으면 세가지 칼로 삽니다.  


세가지 칼은 바로


가위는 재단사 면도칼은 이발사 부엌칼은 당연 요리사입니다.  


우리나라 짜장면의 역사는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화교의 첫번째 물결이 개항이후였다면  


두번째 물결은 1949년 제 2차 국공내전시 공산당의 승리때문였습니다. 제 2차 국공내전은 중국이 일본에 승리한 그러니까 일본이 항복한 


1945년 이후 공산당(당시 중공 현 중국)과 국민당(당시 중(화민)국 현 대만)간의 내전을 말합니다.


당연히 근거지를 잃고 위기감을 느낀 산동쪽 국민당계열들은 가까운 한국으로 피난을나오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교분들은 주로 교동(산동 교주 동쪽)출신인 이유는 우리나라랑 가까운 지리적이유가 제일 큽니다. 


제 어렸을때 제 고향 군산에  중국음식점이 많았는데  거진 산동출신들이셨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6.25 와  


박정희정권때 화교부동산 및 동산매매제한등 차별조치등으로 많이 떠나게 되고 그 빈 주방을 한국인제자나 조수들이 메우게 됩니다.


 '왜 이렇게 짜장면얘기랑 상관없는 얘기가 긴가?'하고 생각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이제 본론입니다. 


짜장면은 바로 산동주방장들이 만든 산동요리 그러니까  중국 8대요리중 하나인 로채(?菜)에 속합니다.  


중국4대요리는 많이 들어보셨을겁니다.  북경, 상해, 광동, 사천요리를 말하지요. 


8대요리로는 산동(?菜) 사천(川菜) 강소(?菜) 절강(浙菜) 안휘(徽菜) 광동(?菜) 복건(?菜) 호남(湘菜) 요리입니다.   


 자! 4대요리에서 8대요리로 늘어나니까 북경요리가 사라졌지요?  북경요리는 원래 산동요리에 속합니다. 


산동요리(?菜)는 넓게 지역적으로 산동 북경 동북을 아우르는 요리이기도 합니다.


북경요리중에서 제일 유명한 간판요리는 뭘까요?  북경오리구이 그리고 북경짜장면입니다. 


중국에서는 면은 요리로 안넣어줍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요리로 취급하니까 넣도록 하겠습니다.


짜장면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춘장입니다. 하지만  중국에는 춘장이 없습니다.  


한국짜장면과 중국짜장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첨면장(?面?)이라는 밀된장을 쓰고 우리나라에서는 첨면장에 


카라멜을 섞은 춘장을 씁니다. 발효된장맛이라 우리나라사람 입에 당연 잘 맞고요 역시 첨면장으로 만든 중국볶음요리몇몇은 


짜장맛과 흡사한 맛이 납니다. 


한국과 중국 짜장의 차별화는 사실 1948년 화교이셨던 왕송산씨가 춘장을 발명하고나서 입니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먹던 짜장면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짜장면을 인천 공화춘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얘기지  


짜장면을 공화춘에서 발명한 건 아닙니다.  


저는 근거미약한 한국짜장면의 창조설을 부정하며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진화설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6.25 이후 한국에 밀가루가 들어오게 된것도 짜장의 진화에 한몫을 합니다.  


원래 첨면장은 대두였는데 밀가루를 넣기 시작하게 된거지요. 지금은 다시 대두를 많이 쓴다고 하는군요.


그다음의 차이는 뭘까요?  야채의 대량투하라고 할까요.  물론 위에 보시는 것처럼 고명으로 야채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다양한 야채를 넣고 볶는건 한국짜장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야채를 넣고 볶은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요 중국에서 양념으로 주는 볶은짜장(첨면장)은 아주 짭니다. 


지금도 역시 짭니다. 중국와서 한국처럼 짜장다넣고 비비시면 짜서 못먹을 정도니 조금씩 넣어서 간을 맞추셔야 합니다.  


야채때문에 짜장의 짠맛을 많이 중화시켜줍니다. 


아마 우리나라 음식들이 염분이 많아서 새로운 중화 짠맛에 저항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저항감을  양배추나 양파로 부드럽게 완화시킨 것 같습니다.


 


결론은 한국짜장면은


중국짜장면에서 진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가 고민되는날엔 짬짜면 드시기를 추천합니다 하하하 .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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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스러운 여성미의 완성 그이름 하이힐 입니다.


하이 힐 ~


말그대로 굽이 높다는 뜻입니다. 현대여성의 전유물 그리고 무기(?) 라고 할 수 있는 (남자에게도 깔창이란게 있긴하지만)요.


하이힐의 발명기와 역사, 그리고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니다.


하이힐의 사전적 의미

하이힐(영어: high-heeled footwear, high heels, heels)은 발꿈치 부분이 높게 들어 올려진 신발을 지칭하는 말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굽이 높은 신발을 가리키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용의 신발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이힐의 유래와 역사.


하이힐이라하면 보통 지금들 생각하시는 것은 키가작은 여성의 키를 높혀주는 역할이라던지 하이힐을 신음으로서 돋보이게 되는 각선미나

이쁘지 않은 다리를 시각적으로 날씬하고 이쁜다리로 보이게도 만들어줘, 어떤 미의 역할로서 여성의 매력을 높히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을 많이들 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하이힐은 말도안되는 이유(?) 로 처음 발명된 이유가 가히 충격적(?) 이기도 하군요.


하이 힐은 16세기 말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17세기 초에 이르러 차차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한 발명이 아니었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과정들의 결과로, 스페인의 여자들이 신었던 목제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 힐

의 선구라고 말해진다. 



특히, 하이 힐은 이태리에서 유행하였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변소 시설이 되어 있는 집이 극히 드물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소변을 거리에 내다버렸고, 이리하여 대부분의 도시 뒷길은 어느 곳이나 쓰레기와 대변이 쌓여 있고, 이것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깊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18세기에도 유럽에는 궁전에조차 변소가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변소가 없어 궁전 복도의 후미진 곳이나 가로수 밑에 대소변 을 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깔끔함을 강조하는(?) 서양도 아주 오랜 옛날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했군요.


하이 힐을 신음으로써 키가 커보이게 하고 몸매의 곡선이 강조되어 보다 여성적 으로 보이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하이 힐은 거리가 더러운 오물이 흐르는 진흙탕이었으므로, 길을 걸을 때 발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꽤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거의 군대에서 신는 군화와 비슷한 맥락의 개발이 아닌가 싶군요.


하이힐의 보급과 보편화바람의 시작은...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 하이힐은 프랑스의 구두 디자이너 로제 비비에에 의해 탄생되었다. 

1954년 파리 시내에 가게를 연 비비에의 첫 창작은 파격 그 자체였다. 

검정,갈색,푸른색이 대부분이던 가죽을 총천연색으로 확대하고 플라스틱,셀로판 섬유 등 가능한 재료를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54년 그는 가는 뒷굽의 하이힐을 내놓음으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이힐이 인기를 끌면서 대중에게 보편화 되기 시작한 시점 이군요.


하이힐의 종류는


토오픈 힐

주로 토오픈, 오픈 토 슈즈라고 불린다. 발가락 부분이 틔어 있는 슈즈. 가장많은 하이힐 종류 같습니다.

 

가보시힐

가보시힐 앞부분에 굽이 있는 힐 종류

시대마다 디자인의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2009년 현재 킬힐의 유행으로 앞부분의 굽이 점점 높아지는 추새이며

평균 1cm, 1.5cm 2cm가 주를 이루고 있다

 

속가보시힐

가보시힐과 같이 앞굽이 있지만 가보시힐과는 다르게 앞굽이 속으로 들어가 있는 형태의 슈즈, 가보시힐의 한 종류

 

웨지힐

앞굽과 뒷굽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 슈즈. 저는 개인적으로 웨지힐이 참 이쁘더라고요

 

백오픈 힐

발 뒷축을 감싸주는 가죽 부분을 끈으로만 고정 시킨 슈즈, 주로 봄부터 여름 하절기에 많이 출시 된다


사이드 오픈 힐

발 옆부분이 틔여 있는 슈즈, 양쪽으로 틔여있는 경우와 한쪽으로만 틔여 있는 경우가 있다


플랫 슈즈

일명 단화, 뒷굽이 낮아 편하게 신을 수 있다. 플랫슈즈도 요새는 꼭 굽이 높은 신발보다도 선호하는 여성들도 많아지는 

추세로 개성을 더 강조하는 정형화된 미를 탈피하고 싶어하는 여성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이힐을 신을때 건강을위해 조심하고 주의해야될점.

하이힐을 신으면 체중이 앞으로 쏠리기 때문에 몸을 뒤로 젖혀야만 똑바로 설 수 있게 된다. 

자연히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엉덩이를 바짝 당긴 자세가 돼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단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잇다. 

하지만 족부정형외과 의사들은 여성의 발 건강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하이힐을 꼽는다. 


장기간 하이힐을 신을 경우 요통,관절염,디스크로 고생할 수 있고, 엄지발가락이 휘면서 참기 힘든 통증을 느끼게 되는 

버선발 기형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불가피하게 하이힐을 신게 되더라도 뒷굽이 4cm 이상인 것은 피하고, 하루 2∼3시간은 넘지 말라고 의사들은 충고한다



미를 위해서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여성의 매력을 무한 뽐내는 것도 좋지만 , 그에 따른 부작용과

생길 수 있는 건강의 위협도 꼭 고려하셔야 되겠죠? 하이 힐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 까지구요 하이힐도 좋치만 건강한 발관리와 함께 멋을 내시기를 추천하네요 안녕히 계세요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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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남녀노소. 전부 입고 패션을 좀 안다하는 피플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아이템. 그 이름은 뭔가


바로 청바지 아니던가요


'청바지에 흰티' 가 어울리는 사람이 정말 진정한 멋쟁이 이다. 라는 문장으로도 형용될 만큼 패션의 선두주자에게는

어디에서나 빠지지않는 그 청바지. 의 유래와 역사 재밌는 이야기들을 알아봅시다.


청바지라고 한다면은 '리바이스'에서 시작하여 '리바이스'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청바지의 독자적인 그 주체는

'리바이스' 라는 브랜드였다.


리바이스의 창시자 Levi Strauss는 독일에서 출생한 독일사람 입니다.

그 후 그는 그의 형제들이 사는 뉴욕으로 이사와서 그들에게 바느질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850년에 Levi는 샌프란시스코에 약간의 돛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천을 가지고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차가운 진흙 강에서 금을 캐고 있는 광부일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굉장히 얇은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청바지라는 자체가 없던 시절이였기 때문에요.

굉장히 추워 보였습니다.


순간 Levi는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가 가져온 돛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천을 이용해 그들에게 바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황회색의 색깔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청바지는 말입니다. 지금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블루진 색깔이 아니였습니다. 황회색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Levi가 샌프란시스코에 양복점(리바이스)을 차렸을 때, 프랑스에서 특별히 짙은 청색의 옷감을 수입했습니다. 

이것이 청바지의 첫 탄생과 기원역사가 된 격입니다. 


그리고 리바이스의 스티치 문양 기원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리바이스 스티치 그 빨간색의 타원형 마크문양 말입니다.

그 것은 아마 Levi가 리바이스를 세운 샌프란시스코가 해안에 접한 도시다 보니 바다의 상징인 갈매기를 스티치로 사용하지 않았나하는

가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리바이스스티치는 2차대전 중 실을 아끼기 위해 페인트로 그리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은 단순히 디자인 만을 위해서 일부러 거센 질감따위의 표현등을 하기위해 넣는 페인트 칠이라던가 하는 따위가

원래는 실과 천을 아끼기 위해서 한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청바지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 청바지의 역사

 

미국의 문화가 당시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의해 퍼져나간 것이 많다.

우리나라도 1950년 한국전쟁 떄 미군이 들어오면서 군복이 아닌 사복차림일 때는 청바지를 입었었는데요.


전후 가난한 시절에 청바지는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 라고합니다..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까지는 독재 정부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며, 부담없이 노상에 앉을수도

있는 편한옷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청바지와 통기타가 유행하던 바로 그시절 그단어로도 유추해볼 수 있게 말입니다.

값싸고 질기며 아무 옷과도 잘어울리는 가장 수수한 차림으로 사랑 받았다.

청바지가 아닌 다른바지는 오히려 안 어울리는 이미지로 보일 정도라고 이야기가 있을정도였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청바지 시대가 도래하였다.

소득 증대로 인하여 외국 청바지 브랜드들이 물밀 듯이 한국에 들어오게되었습니다.


국산 브랜드들도 나름대로 고급화 전략과 방안을구축하고 큰 성공들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는 국산청바지가 외국브랜드의 청바지보다 비싼 것들도 많습니다.


재미난 청바지의 역사와 유래 , 그리고 청바지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야 청바지 맨 ! 


Posted by hstar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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